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패퇴하는 당군 === >태종이 도읍으로 돌아가서 이정(李靖)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 >지금 고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병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그실|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함락시킬 수 없고, 되돌아가려 해도 '''늪지'''에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군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니, 이것이 상책이다.]][* 실제로 고구려군의 반격에 부딪혀 전쟁이 고착화되고 군량 수송로까지 차단당함에 따라 당군은 정말로 태종이 본인 입으로 언급한 '곤란한 지경' 에 빠지게 된다. 이에 더해 설연타까지 반당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고, 결국 당나라군은 태종이 언급한 그 '''늪지'''를 통해서 퇴각하게 된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 예상외로 요동에서의 싸움이 장기전이 된 채로 당군은 점차 싸울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당나라의 후방 지역인 몽골 초원의 튀르크계 [[설연타]] 역시 반당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설연타의 통수는 고구려랑 연계하였다는 견해가 있는데 개연성이 충분하다.], 결국 [[태종(당)|당태종]]과 지휘부는 철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조금 멀지만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랴오허|요하]] 하류의 거대한 늪지대인 요택을 통하여 장안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3일이면 주파할 수 있는 길을 놔두고 굳이 그 몇 배의 시일과 공력이 소요되는 늪지대 요택을 택한 것은 그만큼 당군이 장악한 지역이 협소하고 또 유지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 철수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당군이 확보한 지역은 백암성-요동성-안시성 인근에 불과했다. 요동 방어선 북단의 신성, 남단의 건안성은 굳건했으며, 두 성에(혹은 인근 지역에) 주둔했던 고구려의 10만 대군이 당의 퇴각로를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 당군은 요택의 갈대숲과 늪지대를 고생하며 건너야 했고, 보급마저 끊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당나라 병사들이 죽거나 병이 들어 살아서 돌아간 이는 소수였다고 한다. 설마 당 태종 본인도 이런 식으로 늪을 기어서 돌아올 거라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고구려군 역시 철수하는 당나라군을 그대로 편히 보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안시성 전투 이후 연개소문이 당을 역으로 침공하였고, 급박한 상황에서 당 태종이 우물에 숨었는데, 그 사이 거미가 입구에 거미줄을 쳤고 우물에 쳐진 거미줄을 보고 고구려군이 우물을 살피지 않아 태종이 살았다는 과장된 스토리가 중국 경극에 있을 정도이며, 이는 한국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유명하다. 이후 태종이 거미에게 보답하기 위해 우물 위에 탑을 만들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해당 탑이 아직까지 남아있으나 야사 이외의 기록이 없어서 야사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이때 이세민이 몸소 풀을 베고 수레를 밀며 흙을 나르는 등 당군의 철수 과정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본인도 도중 등창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당 태종은 일찍이 이런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일생 동안 패배를 해본 적이 없는 하늘이 내린 장수였으니 유일한 패배라는 것은 정신적인 타격이 컸을 것이다.]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법정(삼국지)|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곽가|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라고 한탄했다. 당나라 측 기록인 [[자치통감]]에서는 이 전쟁으로 [[정신승리|고구려 성 10개를 공취하고, 고구려군 40,000명가량을 전사시켰으며 민간인 포로 18만, 군량 62만 석 이상을 노획하고, 죽은 당나라 병사는 수륙군 도합 1,200~2,000명, 말은 열에 7~8마리가 죽었다]]라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경미한 피해만을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가 저 수치 중에 수군은 전사자가 아닌 익사자다. 즉,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자면 당나라는 사실상 전사자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하지만 패전한 데다 도주에만 저런 피해를 입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당측의 기록대로라면 당군의 피해가 2,000명 정도로 경미하고, 교환비가 20~40배가 넘으니 이것만 본다면 중원 통일 시절의 전공에 전혀 뒤떨어지지 일인지라 이후에 반전 논의가 나올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 [[고연수]] 역시 고구려를 배신하고 항복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화병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중국에서는 황제라도 자신의 통치에 대해 쓰여진 실록을 볼 수 없었으나[* 당연하지만 역사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자신의 치세에 쓰여진 실록을 보려고 고집했고 실제로 봤으며 [[https://youtu.be/PO0NoJwaeOI?t=52m48s|내용을 고치기도 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서전에서 당군에 비해 훨씬 더 압도적이었으나 1년 동안 병력의 40%을 잃었다. 이곳 저곳의 파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당나라 지휘부의 피해 역시 의외로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필산 전투]]에서 좌무위 장군 왕군악은 참살, [[개모성]] 전투에서 좌둔위 장군 강확은 사살, [[백암성]] 전투에서 저격당한 우위 대장군 이사마는 당해년도에 사망, 우효위 대장군 계필하력 역시 창에 맞아서 생사의 문턱을 오갔으며 [[요동성]] 외곽 전투에서 장군예는 패전의 책임으로 처형당했다. 애매한 참언으로 엮어서 죽인 평양도행군 대총관 장량은[* 능연각 공신, 형부상서] 차치하더라도 부대총관 좌난당은 사망하고, 수군총관 장문간 역시 최소한 위장군급 인사인데 패전의 책임으로 참수당하는 등 수군 역시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철수할 때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연개소문에게는 의복과 활, 화살 등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를 무시하고 사례하지 않았으며, 후에 그가 보낸 서신은 내용이 궤탄하고 당나라를 침입할 뜻이 있어 이세민으로 하여금 분노하여 단교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이세민은 장안으로 돌아와 죽은 병사들을 위해 제를 올리며 눈물을 흘리며 한탄한다. 한편 주필산 전투 후에 당나라에 투항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곧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으로 믿었으나 오히려 당군이 패퇴하고 달아나자 고국을 버리고 투항했던 일을 크게 후회하였다. 결국 고연수는 이 일로 상심하다가 화병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살아서 당 태종을 따라 장안에 도착하였다. 이 [[안시성 전투]]를 비롯한 고당전쟁은 또 후대에 끼친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컸다. 임진왜란에 비유하자면 일본군이 [[전설의 1군|다이묘들과 전국시대 네임드들을 고쿠다카, 명성 랭킹 순서대로 모두 끌고온 상황에서]] 부산~김해 정도만 뚫고 한양은 커녕 대구도 못 가서 양산~밀양~경주~울산 선에서 잘린 셈, 아니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정도로 화려한 진용으로 대외원정을 나간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더군다나 대륙과 북방을 평정한 [[태종(당)|당태종]] 생애 이토록 처참하게 패배한 전투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패배와 함께 구사일생에 가까운 귀국길로 인해 당태종은 임종 직전 후계자인 당 고종에게 절대로 고구려와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고구려]]는 백만대군을 물리친 국가에 더해 [[당나라]] 최고의 [[명군]]이라 꼽히는 '당태종마저 물리친 국가'라는 타이틀까지 추가하게 되어 수백 년 뒤 [[쿠빌라이 칸]]조차 언급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